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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한국사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3)

by 오꽃자매의 봄날 2025. 3. 12.

일제에 휘둘리는 삶으로 악화하고 만 조현병

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은 평온했고 부부 사이도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결혼한지 1년만에 딸을 출산합니다. 딸의 이름은 마사에’, 한국식 이름은 정혜였습니다. 금쪽같은 자식이 생긴 후 덕혜옹주는 어두운 터널에서 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안정을 찾아가던 병증이 다시금 덕혜옹주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도 하고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모습이 병적일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부터 그녀를 괴롭힌 조현병이 악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에는 남편 소 타케유키가 한순간에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일반 시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헌법을 새로 만들고 여러 제도를 바꾸면서 귀족 제도를 폐지하게 된것입니다. 귀족의 작위를 박탈하고 집을 처분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재산세를 내야만 했습니다. 이후 덕혜옹주는 자취를 감추어 버립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정신병원에서 발견되다

4년이 흐른 1950, 김을한이라는 남자가 일본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신문사 도쿄 특파원 기자였습니다. 덕혜옹주의 행방을 찾기위해 일본에 왔습니다. 고종이 살아있을 때 덕혜옹주를 신하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맺어주려 했었습니다. 그 김장한의 형이 바로 김을한입니다. 덕혜옹주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김을한은 경악할 만한 곳에서 덕혜옹주를 찾게 됩니다. 바로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이었습니다. 남편 소 타케유키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지자 도움을 줄 수 없었던 남편이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으로 보내 돌봄을 받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덕혜옹주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김을한은 어떻게든 덕혜옹주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김을한이 덕혜옹주를 찾은 1950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권은 황실 가문 사람이 귀국하면 황실 가문을 지지하는 이들이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정부를 위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귀국추진이 쉽지 않았습니다.

 

37년 만에 밟은 그리운 고향 땅

1956년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딸 정혜가 실종되었습니다. 당시 20대였던 정혜는 어느 날 자살하겠다고 유서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행방불명이 된 후 7년 뒤 정혜는 사망처리되었습니다. 망국의 옹주로서 겪어야 했던 시련, 거기에 더해진 가혹한 운명까지 덕혜옹주의 삶은 비극으로 가득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정부가 교체되자 김을한은 새로운 정부에 덕혜옹주의 안타까운 상황을 알리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귀국의 승인을 받게됩니다.

드디어 1962126일 김포공항에 덕혜옹주가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그녀의 나이는 51세 였습니다. 김포공항에 들어섰을 때 나이 많은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덕혜옹주에게 절을 올립니다. 어린 시절 덕혜옹주를 돌봐줬던 유모 변복동이었습니다. 당시 변복동의 나이는 72세였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만에 재회한 후, 유모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덕혜옹주의 곁을 지켰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는 27년 동안 창덕궁 낙선재에서 남은 삶을 보내다가 7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덕혜옹주의 무덤이 있는데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 아래 우리 민족은 뼈아픈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시대의 비극 속에서 개개인의 삶역시 쉽게 억업당하고 격랑에 휘말려야 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덕혜옹주의 삶도 이러한데 평범한 여인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덕혜옹주의 삶을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던 소중한 일상이었을 겁니다.

 

책 "벌거벗은 한국사(근현대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