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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4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3) 사형선고를 앞두고 올린 옥중 결혼식, 그리고 영원한 이별박열은 담당 판사에게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낼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가네코 후미코와 사진을 찍데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보통은 여자가 의자에 앉고 남자는 그 옆에 똑바로 서서 사진을 찍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하게 찍지 않았습니다. 둘의 포즈는 그 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해 12월 두 사람은 ‘옥중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결혼을 제안한 사람은 일본인 판사였습니다. 이런 대우는 박열이 황태자 암살 계획을 다시 순순히 자백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아무런 물증도 증거도 없는 상화에서 자백만이 유일한 대역죄를 확정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1926년 2월 26일 두 사람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 2025. 3. 11.
열일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 (1) 소녀 열사의 유년 시절 1902년의 어느 날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한 초가집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장소가 바로 유관순 생가 앞에 있는 매봉 교회였습니다. 용두리 마을의 첫 기독교 신자는 바로 유관순의 증조부 유빈기와 육촌 할아버지 유승백이었습니다. 유관순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종교로 인해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평등사상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교회는 놀이터이자 배움터였습니다. 이에 따라 생겨난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태도, 또 내 나라가 존중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피어오른 여러 고민이 독립운동으로 확장되었다고 보입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친구들.. 2025. 3. 9.
500년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일본의 치밀한 계략(2) 넷째, 동학농민혁명 피어오른 청일전쟁의 불씨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백성들이 반외세, 반봉건을 외치면서 봉기를 일으키게 되어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였는데, 이번에도 일본은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여러 부정을 저질러 농민들의 원성을 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해 고부 관청을 습격한 것으로 시작되어 황토현싸움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하고, 장성에서는 정예 부대마저 격퇴했습니다. 1,000여 명으로 시작한 동학농민군은 어느새 수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또다시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텐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조선에 군사가 파견되어 청일 양국이 조선에 개입한다는 소식에 동학농민군은 자진 해산하게 됩니다. 1894년 음력 6월 21일 자정.. 2025. 3. 8.
500년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일본의 치밀한 계략(1) 첫째. 조일수호조규 체결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  1876년,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결정적 계기가 된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1876년 음력 2월에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것입니다. 이 조약은 강화도에서 체결돼 흔히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조일수호조규는 조선과 일본이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통상’ 그리고 ‘교류’를 위해 맺은 조약이었는데요. 이 조일수호조규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요?  제1조.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후 양국은 경계를 침범하거나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   제4조. 조선국은 부산 외에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도록 허가한다.  제10조. 일본 국민이 조선의 항구에서 조선 국민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일본.. 2025.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