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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성13

무신정변(3) 보현원에 불어닥친 피바람 무신정변의 시작의종이 보현원에 들어오고 신하들이 물러나 대기하려는 그 순간! 무신들이 칼을 뽑아 들고 순식간에 왕의 측근인 문신들을 베어버렸습니다. 무신들이 권력을 잡는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첫 날이었습니다. 정변의 불씨를 지핀 한뢰는 침상 밑에 숨지만, 곧 정중부에게 발각되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한뢰를 죽여버립니다. 보현원을 접수한 정중부는 용감하고 날쌘 군인들을 뽑아 이의방, 이고와 함께 궁궐로 보냅니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죽여라!”무신정변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의방과 이고가 문신들을 죽이고 궁을 장악하자 정중부는 왕과 함께 궁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문신과 환관들이 정중부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화.. 2025. 3. 13.
무신정변(2) 억울한 누명을 쓴 무신들 김돈중의 화살 사건1167년 왕이 절에서 연등회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밤 갑자기 의종의 수레 옆으로 화살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본능적으로 암살의 위협을 느낀 의종은 범인을 잡기 위해 범인을 제보하면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고 관직과 함께 어마어마한 재산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범인을 찾지도 못하고 봤다는 사람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의심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왔고, 그중에는 의종의 동생이 부리던 하인도 있었는데 가혹한 심문을 견디지 못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고 목이 베입니다. 또 친위군 장교 14명을 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유배까지 보내버립니다. 하지만 실제로 화살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었습니다. 왕의 비서에 해당하는 ‘좌승선’이라는 직책이 있는데 좌승선은 .. 2025. 3. 13.
무신정변(1) 고려의 두 지배층 문신과 무신고려에는 무반과 문반을 합쳐 양반이라고 불렀습니다. 무반은 오늘날의 군인, 경찰과 같은 일을 한 무신의 반열을 가리키는 말이고, 문반은 공무원이나 법관, 국회의원 등의 역할을 하는 문신의 반열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관직의 높낮이를 총 18단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우선 1 품부터 9품까지 나누고, 같은 품계를 다시 ‘정’과 ‘종’으로 나누었습니다. 문신과 무신 모두 3품까지는 될 수 있었지만, 최상위 등급인 1품과 2품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문신뿐이었습니다. 2품 이상의 고관은 ‘재신’과 ‘추밀’이었는데, 이를 함께 지칭하여 ‘재추’라고 했습니다. 재추는 국가정책을 논의하는 관직으로, 왕을 제외하면 고려에서 제일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문신은 재추에 오를 .. 2025. 3. 13.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3) 일제에 휘둘리는 삶으로 악화하고 만 조현병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은 평온했고 부부 사이도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결혼한지 1년만에 딸을 출산합니다. 딸의 이름은 ‘마사에’, 한국식 이름은 ‘정혜’였습니다. 금쪽같은 자식이 생긴 후 덕혜옹주는 어두운 터널에서 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안정을 찾아가던 병증이 다시금 덕혜옹주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도 하고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모습이 병적일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부터 그녀를 괴롭힌 조현병이 악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에는 남편 소 타케유키가 한순간에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일반 시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헌법을 새로 만들고 여러 제도를.. 2025. 3. 12.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2) 일제의 계략에 휘말려 모국을 떠나 적국으로1925년 3월 덕혜옹주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대로 뒀다간 덕혜옹주를 중심으로 다시 독립운동의 불씨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하고 우려해 우리 민족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도교에 도착한 덕혜옹주는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던 오빠 영친왕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덕혜옹주는 영친왕의 집에서 지내며 도교 여자학습원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덕혜옹주는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밝고 명랑했던 덕혜옹주가 마음에 묵직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조용한 아이로 변한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물이 담긴 보온병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늘 불안해서 어.. 2025. 3. 12.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1) 덕수궁의 보물 늦둥이 고명딸의 탄생1912년 5월 25일, 따사로운 햇살이 덕수궁을 비추고 있던 어느 아름다운 봄날!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며 초조해했던 고종은 이날 태어난 덕혜옹주로 하늘로 날아갈 듯 크게 기뻐했습니다. 고종은 아들만 있고 딸이 한 명도 없었기에 유독 기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하에 9남 4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많은 자녀가 일찍 죽고 세 아들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환갑에 아주 귀하디귀한 고명딸을 얻은 것입니다.  고종의 품에서 행복했던 유년시절그런데 왜 덕혜옹주는 공주가 아닌 옹주로 불린 걸까요? 덕혜옹주의 어머니는 양귀인이라는 후궁이었습니다. 후궁의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불렸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데려갑니다. 함녕전은 덕수궁에 있는 고종의 침전이었습니다. 왕만.. 2025.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