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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2)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박열이 스무 살이 된 1922년 2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운명적인 상대가 나타납니다. 어느 날, 어묵 가게에서 일하던 종업원,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인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조선인이 하나가 돼서 일본에 저항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뒤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주목해 오고 있었습니다. 후미코가 박열에게 반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크게 감명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후미코도 박열과 같은 아나키스트기도 했습니다. 박열은 후미코의 고백을 받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여 이름도 한국식 이름.. 2025. 3. 11.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1) 스스로 이름을 바꾼 조선인 꼬마박열의 원래 이름은 ‘박준식’으로 그는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서당을 다니며 한자를 배우던 여덟 살 무렵의 어느 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앞으로 제 이름은 ‘열’이라고 불러주세요”그러니까 박열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매울 열, 세찰 열을 써서 ‘나는 결심한 것은 꼭 이루고 마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의미로 불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정의로운 성격에 굉장히 불같았다고 합니다. 열 살이 되던 1912년에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박열은 개화된 일본인의 모습을 보고 일본의 신식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인.. 2025. 3. 11.
열입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2) 횃불을 들어 되살린 거족적 만세운동의 불씨 만세운동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3월 5일, 두 명의 남학생이 ‘조선 독립’일 적힌 깃발을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신호탄을 삼아 많은 사람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나아갔고 이 군중 속에는 유관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일본 경찰들이 시위 중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검거하였습니다. 유관순과 이화학당 학생들도 여럿 붙잡혔는데 바로 석방되었습니다. 이화학당의 교사인 외국인 선교사의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일본도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3월 10일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선포했습니다. 학생들을 모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도 어쩔 수 없이 고향 천안으로.. 2025. 3. 10.
열일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 (1) 소녀 열사의 유년 시절 1902년의 어느 날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한 초가집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장소가 바로 유관순 생가 앞에 있는 매봉 교회였습니다. 용두리 마을의 첫 기독교 신자는 바로 유관순의 증조부 유빈기와 육촌 할아버지 유승백이었습니다. 유관순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종교로 인해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평등사상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교회는 놀이터이자 배움터였습니다. 이에 따라 생겨난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태도, 또 내 나라가 존중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피어오른 여러 고민이 독립운동으로 확장되었다고 보입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친구들.. 2025.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