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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한국사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1)

by 오꽃자매의 봄날 2025. 3. 11.

덕수궁의 보물 늦둥이 고명딸의 탄생

1912525, 따사로운 햇살이 덕수궁을 비추고 있던 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며 초조해했던 고종은 이날 태어난 덕혜옹주로 하늘로 날아갈 듯 크게 기뻐했습니다. 고종은 아들만 있고 딸이 한 명도 없었기에 유독 기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하에 94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많은 자녀가 일찍 죽고 세 아들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환갑에 아주 귀하디귀한 고명딸을 얻은 것입니다.

 

고종의 품에서 행복했던 유년시절

그런데 왜 덕혜옹주는 공주가 아닌 옹주로 불린 걸까요? 덕혜옹주의 어머니는 양귀인이라는 후궁이었습니다. 후궁의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불렸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데려갑니다. 함녕전은 덕수궁에 있는 고종의 침전이었습니다.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에서 왕이 아니면서 왕의 침전에서 지낸 사람은 조선이 세워진 이후 덕혜옹주가 유일했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덕혜옹주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고종은 딸을 위해 조선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파격적인 일을 감행했습니다. 최초 근대식 왕실 유치원을 만들어서 새로운 학문과 노래와 율동, 체육활동을 배울수 있게 해 주었으며,,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을 여러 명 선발해 동급생으로 엮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 덕분에 덕혜옹주는 성격이 밝았고,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명랑 소녀로 자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과 유치원까지 150미터의 거리를 가마를 태워 보냈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에게는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어 한 딸바보 아빠였습니다.

 

덕혜옹주의 왕실 입적을 위한 딸바보 고종의 비책

덕혜옹주는 다섯 살이 넘도록 왕실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왕실족보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일본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일본은 덕혜옹주 어머니 양귀인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입적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하루빨리 왕실의 후손으로 입적시켜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총독부의 데라우치 총독이 덕수궁을 방문하자 고종은 부랴부랴 그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덕혜옹주를 불러내고는 이 아이가 내가 만년에 얻은 아이이며 이 아이로 인해 덕수궁이 웃음소리로 넘쳐나며 내 노후의 쓸쓸함을 달래 주는 것은 오로지 이 아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종의 적극적인 행동에 일본 총독도 더 반대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얼마 후 덕혜옹주의 입적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었습니다.

 

일제가 무너뜨린 약혼 계획

고종은 덕혜만은 꼭 우리나라 사람과 혼인을 시킨다고 선언합니다. 딸마저 일본으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약혼을 추진하겠다고 말한 때가 덕혜옹주의 나이는 불과 여섯 살이었습니다. 아들 영천왕도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의 황족과 결혼하게 된 일을 떠올리며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 사람과 혼인을 시켜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에 일본인의 혈통을 섞어 장기적으로 일왕 가문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의 왕공족을 어떻게든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총애하던 비서 김황진의 조카인 여섯 살 김장한과 약혼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김황진의 덕수궁 출입을 금지시키고 막아버렸습니다. 딸의 미래를 지켜 주고 싶었던 고종은 사사건건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에 또다시 깊이 절망에 빠집니다.

 

고종의 죽음이 남긴 의혹, 시작된 덕혜옹주의 비극

1919121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고종의 죽음이 독살을 당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고종은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밀사를 파견하려다 일제에 들키고 말았는데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일제가 고종을 무참히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고종의 사망 원인을 뇌출혈로 공표한 일제는 고종의 장례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일본식으로 치러진 사실이 우리를 더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홉 살이 된 덕혜옹주는 경성에 있는 일본인 학교에 입학해 일본인처럼 교육을 받습니다. 일본이 시키는 대로 학교 생활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덕혜옹주의 일상들이 우리나라 신문에 실렸습니다. 일제는 독립운동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덕혜옹주가 대한제국 언론에 자꾸 보도되니 그 모습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주시했습니다. 덕혜옹주는 그저 묵묵히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 "벌거벗은 한국사(근현대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