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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3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3) 사형선고를 앞두고 올린 옥중 결혼식, 그리고 영원한 이별박열은 담당 판사에게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낼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가네코 후미코와 사진을 찍데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보통은 여자가 의자에 앉고 남자는 그 옆에 똑바로 서서 사진을 찍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하게 찍지 않았습니다. 둘의 포즈는 그 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해 12월 두 사람은 ‘옥중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결혼을 제안한 사람은 일본인 판사였습니다. 이런 대우는 박열이 황태자 암살 계획을 다시 순순히 자백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아무런 물증도 증거도 없는 상화에서 자백만이 유일한 대역죄를 확정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1926년 2월 26일 두 사람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 2025. 3. 11.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2)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박열이 스무 살이 된 1922년 2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운명적인 상대가 나타납니다. 어느 날, 어묵 가게에서 일하던 종업원,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인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조선인이 하나가 돼서 일본에 저항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뒤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주목해 오고 있었습니다. 후미코가 박열에게 반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크게 감명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후미코도 박열과 같은 아나키스트기도 했습니다. 박열은 후미코의 고백을 받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여 이름도 한국식 이름.. 2025. 3. 11.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1) 스스로 이름을 바꾼 조선인 꼬마박열의 원래 이름은 ‘박준식’으로 그는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서당을 다니며 한자를 배우던 여덟 살 무렵의 어느 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앞으로 제 이름은 ‘열’이라고 불러주세요”그러니까 박열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매울 열, 세찰 열을 써서 ‘나는 결심한 것은 꼭 이루고 마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의미로 불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정의로운 성격에 굉장히 불같았다고 합니다. 열 살이 되던 1912년에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박열은 개화된 일본인의 모습을 보고 일본의 신식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인.. 2025.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