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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8

무신정변(1) 고려의 두 지배층 문신과 무신고려에는 무반과 문반을 합쳐 양반이라고 불렀습니다. 무반은 오늘날의 군인, 경찰과 같은 일을 한 무신의 반열을 가리키는 말이고, 문반은 공무원이나 법관, 국회의원 등의 역할을 하는 문신의 반열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관직의 높낮이를 총 18단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우선 1 품부터 9품까지 나누고, 같은 품계를 다시 ‘정’과 ‘종’으로 나누었습니다. 문신과 무신 모두 3품까지는 될 수 있었지만, 최상위 등급인 1품과 2품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문신뿐이었습니다. 2품 이상의 고관은 ‘재신’과 ‘추밀’이었는데, 이를 함께 지칭하여 ‘재추’라고 했습니다. 재추는 국가정책을 논의하는 관직으로, 왕을 제외하면 고려에서 제일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문신은 재추에 오를 .. 2025. 3. 13.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3) 일제에 휘둘리는 삶으로 악화하고 만 조현병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은 평온했고 부부 사이도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결혼한지 1년만에 딸을 출산합니다. 딸의 이름은 ‘마사에’, 한국식 이름은 ‘정혜’였습니다. 금쪽같은 자식이 생긴 후 덕혜옹주는 어두운 터널에서 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안정을 찾아가던 병증이 다시금 덕혜옹주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도 하고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모습이 병적일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부터 그녀를 괴롭힌 조현병이 악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에는 남편 소 타케유키가 한순간에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일반 시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헌법을 새로 만들고 여러 제도를.. 2025. 3. 12.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2) 일제의 계략에 휘말려 모국을 떠나 적국으로1925년 3월 덕혜옹주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대로 뒀다간 덕혜옹주를 중심으로 다시 독립운동의 불씨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하고 우려해 우리 민족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도교에 도착한 덕혜옹주는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던 오빠 영친왕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덕혜옹주는 영친왕의 집에서 지내며 도교 여자학습원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덕혜옹주는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밝고 명랑했던 덕혜옹주가 마음에 묵직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조용한 아이로 변한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물이 담긴 보온병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늘 불안해서 어.. 2025. 3. 12.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1) 덕수궁의 보물 늦둥이 고명딸의 탄생1912년 5월 25일, 따사로운 햇살이 덕수궁을 비추고 있던 어느 아름다운 봄날!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며 초조해했던 고종은 이날 태어난 덕혜옹주로 하늘로 날아갈 듯 크게 기뻐했습니다. 고종은 아들만 있고 딸이 한 명도 없었기에 유독 기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하에 9남 4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많은 자녀가 일찍 죽고 세 아들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환갑에 아주 귀하디귀한 고명딸을 얻은 것입니다.  고종의 품에서 행복했던 유년시절그런데 왜 덕혜옹주는 공주가 아닌 옹주로 불린 걸까요? 덕혜옹주의 어머니는 양귀인이라는 후궁이었습니다. 후궁의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불렸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데려갑니다. 함녕전은 덕수궁에 있는 고종의 침전이었습니다. 왕만.. 2025. 3. 11.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2)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박열이 스무 살이 된 1922년 2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운명적인 상대가 나타납니다. 어느 날, 어묵 가게에서 일하던 종업원,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인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조선인이 하나가 돼서 일본에 저항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뒤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주목해 오고 있었습니다. 후미코가 박열에게 반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크게 감명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후미코도 박열과 같은 아나키스트기도 했습니다. 박열은 후미코의 고백을 받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여 이름도 한국식 이름.. 2025. 3. 11.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1) 스스로 이름을 바꾼 조선인 꼬마박열의 원래 이름은 ‘박준식’으로 그는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서당을 다니며 한자를 배우던 여덟 살 무렵의 어느 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앞으로 제 이름은 ‘열’이라고 불러주세요”그러니까 박열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매울 열, 세찰 열을 써서 ‘나는 결심한 것은 꼭 이루고 마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의미로 불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정의로운 성격에 굉장히 불같았다고 합니다. 열 살이 되던 1912년에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박열은 개화된 일본인의 모습을 보고 일본의 신식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인.. 2025.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