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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8

무신정변(3) 보현원에 불어닥친 피바람 무신정변의 시작의종이 보현원에 들어오고 신하들이 물러나 대기하려는 그 순간! 무신들이 칼을 뽑아 들고 순식간에 왕의 측근인 문신들을 베어버렸습니다. 무신들이 권력을 잡는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첫 날이었습니다. 정변의 불씨를 지핀 한뢰는 침상 밑에 숨지만, 곧 정중부에게 발각되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한뢰를 죽여버립니다. 보현원을 접수한 정중부는 용감하고 날쌘 군인들을 뽑아 이의방, 이고와 함께 궁궐로 보냅니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죽여라!”무신정변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의방과 이고가 문신들을 죽이고 궁을 장악하자 정중부는 왕과 함께 궁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문신과 환관들이 정중부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화.. 2025. 3. 13.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3) 일제에 휘둘리는 삶으로 악화하고 만 조현병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은 평온했고 부부 사이도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결혼한지 1년만에 딸을 출산합니다. 딸의 이름은 ‘마사에’, 한국식 이름은 ‘정혜’였습니다. 금쪽같은 자식이 생긴 후 덕혜옹주는 어두운 터널에서 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안정을 찾아가던 병증이 다시금 덕혜옹주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도 하고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모습이 병적일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부터 그녀를 괴롭힌 조현병이 악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에는 남편 소 타케유키가 한순간에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일반 시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헌법을 새로 만들고 여러 제도를.. 2025. 3. 12.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1) 덕수궁의 보물 늦둥이 고명딸의 탄생1912년 5월 25일, 따사로운 햇살이 덕수궁을 비추고 있던 어느 아름다운 봄날!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며 초조해했던 고종은 이날 태어난 덕혜옹주로 하늘로 날아갈 듯 크게 기뻐했습니다. 고종은 아들만 있고 딸이 한 명도 없었기에 유독 기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하에 9남 4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많은 자녀가 일찍 죽고 세 아들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환갑에 아주 귀하디귀한 고명딸을 얻은 것입니다.  고종의 품에서 행복했던 유년시절그런데 왜 덕혜옹주는 공주가 아닌 옹주로 불린 걸까요? 덕혜옹주의 어머니는 양귀인이라는 후궁이었습니다. 후궁의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불렸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데려갑니다. 함녕전은 덕수궁에 있는 고종의 침전이었습니다. 왕만.. 2025. 3. 11.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3) 사형선고를 앞두고 올린 옥중 결혼식, 그리고 영원한 이별박열은 담당 판사에게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낼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가네코 후미코와 사진을 찍데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보통은 여자가 의자에 앉고 남자는 그 옆에 똑바로 서서 사진을 찍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하게 찍지 않았습니다. 둘의 포즈는 그 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해 12월 두 사람은 ‘옥중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결혼을 제안한 사람은 일본인 판사였습니다. 이런 대우는 박열이 황태자 암살 계획을 다시 순순히 자백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아무런 물증도 증거도 없는 상화에서 자백만이 유일한 대역죄를 확정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1926년 2월 26일 두 사람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 2025. 3. 11.
열입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2) 횃불을 들어 되살린 거족적 만세운동의 불씨 만세운동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3월 5일, 두 명의 남학생이 ‘조선 독립’일 적힌 깃발을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신호탄을 삼아 많은 사람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나아갔고 이 군중 속에는 유관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일본 경찰들이 시위 중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검거하였습니다. 유관순과 이화학당 학생들도 여럿 붙잡혔는데 바로 석방되었습니다. 이화학당의 교사인 외국인 선교사의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일본도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3월 10일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선포했습니다. 학생들을 모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도 어쩔 수 없이 고향 천안으로.. 2025. 3. 10.
열일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 (1) 소녀 열사의 유년 시절 1902년의 어느 날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한 초가집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장소가 바로 유관순 생가 앞에 있는 매봉 교회였습니다. 용두리 마을의 첫 기독교 신자는 바로 유관순의 증조부 유빈기와 육촌 할아버지 유승백이었습니다. 유관순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종교로 인해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평등사상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교회는 놀이터이자 배움터였습니다. 이에 따라 생겨난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태도, 또 내 나라가 존중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피어오른 여러 고민이 독립운동으로 확장되었다고 보입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친구들.. 2025.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