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된 강화 천도 끝나지 않는 백성들의 고난
몽골에 항복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최 씨 정권은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강화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었습니다. 수도는 보통 교통이 발달한 곳에 있기 마련인데 섬으로 옮긴다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수도롤 방어해야 하는데, 1차 전쟁을 통해 개경에 머무는 한 몽골군을 막기가 불가능하고, 몽골에는 바다가 없어 몽골군이 배를 타고 싸우는 해전에 약했기 때문에 몽골군이 강화도를 쉽게 점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들이 강화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일은 성벽을 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자신들이 지낼 궁궐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당연히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피와 땀, 눈물로 궁궐과 관아 등이 지어졌습니다.
고려 백성들의 삶은 무척 고단했습니다. 몽골군은 떠났지만 고통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일부 백성은 고려 정부와 최씨 무신정권을 비판하며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몽골의 2차 침입 몽골 총사령관을 향한 고려 승려의 화살
몽골은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크게 분노하게 됩니다.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다시 고려를 침략합니다. 1차 침략으로 고려 땅을 폐허로 만들고 돌아간 지 8개월도 되지 않은 1232년 이었습니다.
몽골군을 이끈 장수는 살리타였습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고려를 제대로 짓밟겠다는 듯 빠른 속도로 진격했습니다. 1232년 12월 16일 살리타는 지금의 용인 지역인 처인성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처인성을 차지하면 경상도로의 진격이 가능해져 고려 입장에서는 꼭 지켜야 하는 성이었습니다.
몽골군이 처인성에 당도하자마자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습니다. 살리타가 화살에 맞았습니다. 총사령관이 죽게 되어 몽골군은 놀라 전쟁을 중지하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살리타에게 화살을 쏜 사람은 김윤후. 그는 승려였습니다. 몽골의 총사령관이 군인도 아닌 승려의 화살에 맞아 죽었으니 몽골로서는 커다란 치욕이었습니다. 승려 김윤후와 함께 처인성을 지키던 이들 또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특수한 행정구역인 향, 부곡, 소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향, 부곡, 소는 다른 나라에서 넘어와 정착한 사람들, 반역죄를 지은 사람들,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특별한 물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처인성은 원래 ‘처인부곡’이라는 곳에 있던 작은 토성이었습니다. 이곳에는 근처에 사는 농민들뿐만 아니라 주변지역에서 전투를 피해 온 군인들과 노비들이 있었습니다. 고려에서 가장 힘없고 차별받던 이들이 살던 이 처인부곡에서 김윤후가 날린 화살 한 방이 몽골군을 격퇴한 것입니다. 처인성 전투의 승리로 훗날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됐고,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지위도 향상되었습니다.
간절한 소망으로 완성한 팔만대장경
총사령관 살리타의 죽음으로 몽골군은 후퇴했지만, 그렇다고 고려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235년에는 살리타 죽음에 대한 복수를 빌미로 3차 침입을 했고 고려 정부는 몽골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며 항복을 맹세해야만 했습니다. 1247년에는 고려가 약속을 어겼다며 4차 침입을 감행했고, 1248년 자신들의 황제가 죽자 고려에서 떠났습니다. 몽골의 네 번째 침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잦은 침략에 누구보다 고통받은 것은 백성이었습니다. 수차례의 침략을 받은 고려인들이 기댈 곳은 종교뿐이었습니다. 불교의 힘으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글씨를 새길 나무를 운반하는 데에만 무려 8만 명에서 12만 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판에 글자를 하나하나 손으로 새기는 일에 들인 시간과 정성 역시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고려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으로 팔만대장경은 완성되었습니다.
책 "벌거벗은 한국사(사건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