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독립을 지지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박열이 스무 살이 된 1922년 2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운명적인 상대가 나타납니다. 어느 날, 어묵 가게에서 일하던 종업원,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인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조선인이 하나가 돼서 일본에 저항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뒤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주목해 오고 있었습니다. 후미코가 박열에게 반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크게 감명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후미코도 박열과 같은 아나키스트기도 했습니다. 박열은 후미코의 고백을 받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여 이름도 한국식 이름으로 ‘박문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동거는 연인 관계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항일운동을 함께할 동지로서 관계를 맺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불꽃같은 항일운동으로 일본 경찰의 표적이 되다
박열은 일본 내에서 친일파와 독립자금을 횡령하는 부정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직접 처단하고 폭행하여 체포되기도 합니다. 어느 사건에도 조선인을 위해서라면 제대로 조사하라며 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 경찰의 극심한 감시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박열은 멈추지 않고 항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가 1년여 뒤에 일본 천황의 아들 황태자 히로히토가 결혼실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결혼식장에 폭탄을 던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계획은 후미코에게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폭탄을 구하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의열단원들을 포함해 조선인들에게 폭탄 반입을 시도했습니다.
관동대지진 후 학살의 표적이 된 조선인
1923년 9월 1일 오전, 일본 역사상 최악의 대제앙으로 불리는 광동대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일본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고 있다는 가짜뉴스가 퍼지고, 조선인이 도쿄시의 전멸을 기도하며 폭탄을 투척하고 독약을 사용해 살해를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각지의 경찰서에 조선인들을 경계하고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조선인을 죽여도 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경제 불황으로 가뜩이나 불만이 커지던 상황에 지진까지 일어나자 더욱더 화가 난 일본 국민들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을 이용한 것입니다. 자경단은 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했습니다.. 자경단에 의해 살해된 조선인은 6,661명에 이른다고 나왔으나 실제로는 1만 5,000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황태자 암살 계획을 스스로 밝히다
광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이틀 뒤, 박열이 체포되고 맙니다. 본인 소유의 집도 없고, 직장도 없다는 이유로 후미코도 함께 체포되고 맙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신문에서 천황의 아들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한 조선의 비밀결사를 검거했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이 박열이라고 나옵니다. 박열은 마음만 먹었지 제대로 준비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박열의 자백에서 나왔습니다. 억울하다며 항변하는게 당연한 일인데 죄도 없이 체포되었고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죽느니 차라리 상황을 역이용해 항일운동에 적극 활용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단순 범죄자가 아닌 대역죄인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함께 체포된 가네코 후미코도 박열처럼 당당하게 자백했고 두 사람은 함께 재판을 받게 됩니다.
기꺼이 불량한 조선인이 되겠다! 당당히 내건 조건
박열은 자신의 일생이 걸린 재판을 앞두고, 재판관에게 네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첫째, 법정에서 조선의 예복을 입겠다.
“재판관은 천황을 대표해 법정에 나올 때 법관목을 입지 않는가?? 나는 조선을 대표해 법정에 서는 것이니 조선의 옷을 입겠소.”
둘째, 법정에 서는 취지를 내가 선언하겠다.
“나는 조선을 강탈한 일본의 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조선 민족을 대표해 법정에 서는 것이오. 그러니 그 취지를 내 입으로 이야기하게 해 주시오.”
셋째, 조선어를 쓸 테니 통역관을 준비해 달라.
넷째, 재판관이 앉는 자리와 눈높이를 같게 해 달라.
일본어가 아닌 조선말로 자신을 변호하겠으니 당당하게 통역을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자신은 조선을 대표해 법정에 서는 것이니 일본을 대표하는 재판관과 동등한 입장에서 잘잘못을 가리자고 말한 것입니다.
일본 재판관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만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요구를 두 가지나 들어주기로 결정한 건 우리는 폭탄테러를 계획하는 조선인에게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재판하는 문명국가임을 국제사회에 피력하려고 했습니다.
책 "벌거벗은 한국사(근현대편)" 중에서
'벌거벗은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이유(1) (1) | 2025.03.11 |
---|---|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3) (1) | 2025.03.11 |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1) (2) | 2025.03.11 |
열입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2) (5) | 2025.03.10 |
열일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 (1) (0) | 2025.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