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을 들어 되살린 거족적 만세운동의 불씨
만세운동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3월 5일, 두 명의 남학생이 ‘조선 독립’일 적힌 깃발을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신호탄을 삼아 많은 사람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나아갔고 이 군중 속에는 유관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일본 경찰들이 시위 중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검거하였습니다. 유관순과 이화학당 학생들도 여럿 붙잡혔는데 바로 석방되었습니다. 이화학당의 교사인 외국인 선교사의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일본도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3월 10일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선포했습니다. 학생들을 모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도 어쩔 수 없이 고향 천안으로 돌아왔습니다.
3월 31일 밤, 유관순은 천안 병천면에 있는 매봉산에 올라 횃불에 불을 붙여 치켜들었습니다. 그 순간! 놀랍게도 다른 마을의 산에서도 하나둘 횃불이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횃불은 유관순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이 주고받은 신호였습니다. 유관순은 이곳 천안 병천면에서 또 한 번 만세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버지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유중권은 딸 유관순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리하여 4월 1일 거사 장소를 아우내 장터로 정하고 한땀 한땀 태극기를 그려나가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유관순 울부짖게 한 아우내 장터의 비극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놀랍게도 무려 3,000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태극기를 흔들고 큰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를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총과 칼까지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 시위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유관순을 절망에 빠뜨리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일본군에 항의하던 아버지 유중권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남편의 죽음에 격분한 어머니도 일본군에게 달려들다가 칼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날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으로 열아홉 명이 순국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유관순이 독립투사로 변모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의 잔혹한 만행! 제암리 학살 사건
4월 15일 제암리 마을의 성인 남자들은 모두 빠짐없이 교회로 모이라는 일본군의 말로 영문도 모른 채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약 스무 명의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총을 마구 난사하고 불까지 질러버렸습니다. 보름 전인 3월 31일에 발안 장터에서 제암리 주민들과 고주리의 일부 주민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분풀이하듯 학살을 벌인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군의 총칼에 제암리 주민 약 30명이 목숨을 잃었고 고주리에 살고 있던 독립운동가 김흥렬과 그의 일가족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날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장소가 2024년 4월에 개관한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입니다. 화성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다양한 기록과 그 흔적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린 소녀에게 내려진 법정 최고형
아우내 장터에서 종적을 감췄던 유관순은 얼마 후 용두리 마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두 남동생이 걱정되어 만나러 왔다가 체포된 것입니다. 유관순은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 법정 앞에 서게 됩니다. 1심 재판에서 선고받은 형량은 징역 5년 형이었습니다. 어린 소녀에게 너무나도 지나친 형벌이었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이 받은 형량도 징역 3년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관순의 5년 형은 말이 되지 않는 지나친 형량이었습니다. 유관순의 죄목은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내란죄에 준하는 혐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선동해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혐의로 해석이 됩니다. 유관순은 1심 재판에서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나를 너희가 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으며 유관순이 재판정에서 의자를 던졌다는 일본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어린 유관순은 자신에게 불합리한 판결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6월 30일 2심에서는 내란죄가 성립되지 않아 징역 3년 형을 받았지만 만세 운동자의 형 가운데 최고형이었습니다.
참혹했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수감 생활
감색의 수인복을 입은 유관순이 들어선 곳은 서대문형무소의 여옥사 8호 감방이었습니다. 3평 남짓한 비좁은 이 감방에서 7~8명의 수감자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는 냄새 나는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습니다. 11월에는 새로운 수감자로 갓난아이가 들어왔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잡혀 들어온 양명이라는 수감자가 출산이 임박하여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출산 후 아이와 함께 다시 투옥된 것입니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감옥에서 유관순과 8호 감방의 수감자들은 불평 대신 육아를 돕겠다고 나서며 유관순은 꽁꽁 언 기저귀를 몸에 감아 자신의 체온으로 말려 주기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만세운동을 이끌다
해가 바뀌고 열일곱 살이 된 어느 날, 유관순관 수감자들이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이날이 1920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난 지 딱 1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감방의 수감자들이 하나둘 소리치기 시작하였고, 어느덧 3,000여 명의 수감자가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옥중 만세운동 이후, 유관순은 고문실로 끌려가 견딜 수 없는 매질과 가혹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출소를 4개월 앞두고 죽음을 맞이하다.
1920년 4월 특별사면으로 유관순은 3년 형에서 1년 6개월 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제 유관순은 9개월만 버티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소 약 4개월 남은 9월 28일 유관순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망 원인은 장기 손상과 방광 파열이었습니다. 일제의 고문과 구타를 더는 견뎌내지 못한 것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용감했던 유관순은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유관순은 광복이 아니라 죽음으로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뜻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이 공동묘지는 1930년 중반, 일제의 군용기지로 개발되면서 정리되었는데 유관순의 묘는 무연고로 분류되면서 화장된 뒤 다른 묘들처럼 합장되고 말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밝혀 준 유관순의 영웅적 면모와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영국인 선교사가 남긴 말을 기억하며 우리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한국인이여, 1919년 당시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린 빚을 잊지 마시오.”
책 "벌거벗은 한국사(현대편)" 에서
'벌거벗은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2) (1) | 2025.03.11 |
---|---|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1) (2) | 2025.03.11 |
열일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 (1) (0) | 2025.03.09 |
500년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일본의 치밀한 계략(2) (2) | 2025.03.08 |
500년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일본의 치밀한 계략(1) (0) | 202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