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동학농민혁명 피어오른 청일전쟁의 불씨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백성들이 반외세, 반봉건을 외치면서 봉기를 일으키게 되어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였는데, 이번에도 일본은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여러 부정을 저질러 농민들의 원성을 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해 고부 관청을 습격한 것으로 시작되어 황토현싸움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하고, 장성에서는 정예 부대마저 격퇴했습니다. 1,000여 명으로 시작한 동학농민군은 어느새 수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또다시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텐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도 조선에 군사가 파견되어 청일 양국이 조선에 개입한다는 소식에 동학농민군은 자진 해산하게 됩니다.
1894년 음력 6월 21일 자정. 일본의 무장한 군사들이 경복궁의 담을 넘어 고종의 침소를 침입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 전에 고종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청나라 군대를 조선 영토 밖으로 쫓아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종은 미국과 영국에 도움을 청했으나 두 나라는 조선 정국에 개입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습격하고 이틀 뒤,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약 9개월간 이어진 전투 끝에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합니다.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독립 자주를 손상하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공헌, 전례 등은 장래 완전히 이를 폐지한다.”
이 조약을 보면 조선에 이익이 되는 내용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는 조선은 확실한 독립국이니 청나라는 신경 쓰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즉 청나라는 이제 조선에서 빠지라는 얘기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꽉 막혀 있던 조선의 숨통이 뜻밖의 사건 덕분에 트이게 됩니다. 1895년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일본의 만주 진출을 막기 위해 압력을 가한 ‘삼국간섭’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 나라의 압력을 받은 일본은 청나라에 다시 요동 반도를 반환했고 일본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에도 잠시 평화가 찾아온 듯했습니다.
다섯째, 을미사변 국모가 살해되고 만 비극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에 침입한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가슴을 짓밟은 채로 날카로운 칼을 휘둘렀습니다. 죽인 다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기까지 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비가 다른 나라 자객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 동서고금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참극 중 참극이었습니다.
명성황후를 노린 이유는 러시아와 정치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러시아를 막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도 큰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이며, 러시아가 일본을 공격할 빌미를 주게 되면 심각한 외교적 피해를 줄 수도 있었지요.
이 때문에 일본은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조선 내부의 정치 다툼에서 일어난 일로 꾸며 흥선대원군에게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죄를 뒤집어씌울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던 바로 그때! 이 잔혹한 사건을 목격한 뜻밖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자객들이 달려들자 궁내부 대신들은 왕후를 보호하려고 두 팔을 벌려 앞을 막았다. 자객들은 수차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거듭 찔렀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도 살해되었다.”
사건을 목격하고 그 진상을 폭로한 사람들은 서양 외교관들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극악무도한 일본의 계략은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간 머물게 됩니다. 일본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한 고종의 최후 선택이었습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 바람에 조선은 청나라, 일본에 이어 러시아의 내정간섭까지 받게 됩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초대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열강들 사이에서 자주국의 지위를 지키려는 마지막 노력이었습니다.
여섯째, 을사늑약 체결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아관파천 8년 후인 1905년 11월 17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대한 제국의 국권이 침탈당한 바로 그 사건!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찾아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라며 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였고 이에 고종은 체결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가 군사를 동원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고종의 허락조차 받지 않은 날강도 같은 조약이었습니다. 이날 을사늑약에 찬성한 다섯 명의 대신이 바로 을사오적 이완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이다.
외교권이 넘어간다는 것은 다른 나라와 교섭할 수 있는 권리 자체가 박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역할 때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우리나라의 광산, 목재 같은 이권을 팔 때도 권한을 가질 수 없으니 일본이 우리나라 대신 국가적 이권을 사고파는 행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심지어 을사늑약 체결 2년 뒤인 1907년에는 고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즉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겠다는 일본의 계획은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일본과의 병합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한일합병조약 체결서’에 순종은 도장을 찍습니다. 이 사건을 경술년에 당한 나라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이라 해서 ‘경술국치’라고 부릅니다. 일본은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을 기념하여 엽서를 만들어 배포했으며 엽서를 통해 한일강제병합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또 미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국권을 침탈할 일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아픈 역사를 똑바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이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입니다.
책 "벌거벗은 한국사(근현대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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