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조일수호조규 체결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
1876년,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결정적 계기가 된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1876년 음력 2월에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것입니다. 이 조약은 강화도에서 체결돼 흔히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조일수호조규는 조선과 일본이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통상’ 그리고 ‘교류’를 위해 맺은 조약이었는데요. 이 조일수호조규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요?
제1조.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후 양국은 경계를 침범하거나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
제4조. 조선국은 부산 외에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도록 허가한다.
제10조. 일본 국민이 조선의 항구에서 조선 국민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일본 관리가 심판한다.
조일수호조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에만 유리한, 정말 말도 안 되는 조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제법상 다들 조약을 맺는다는 이유로 조선은 일본의 이런 속내를 전혀 모른 채 덜컥 조약을 체결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임오군란 일본의 개입이 시작된다.
1882년 음력 6월 9일에 발생한 ‘임오군란’
신식 군대 별기군 창설로 인하여 차별받던 구식 군인들이 분개해 일으킨 군란을 임오군란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요.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구식 군인들의 힘이 약해지면서 기존에 받던 세금도 못 받고 뇌물도 못 받게 된 상황에서 밀린 월급으로 모래 섞인 쌀을 받으니 참지 못하고 군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에 고종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약 3,000명의 청나라 군인이 파견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까지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때 구식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도 공격하여 약 1,500명의 일본군을 데려왔는데 아마 청나라 군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셋째, 갑신정변 고종을 잠재워 개혁을 꾀한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게 한 세 번째 결정적 사건. 조선의 젊은 관료들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이 일어난 순간입니다. 일본을 둘러보고 온 김옥균이 일본에서 목격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조선도 하루빨리 기계를 도입해 근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점진적 개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생각의 차이를 확인한 김옥균을 중심으로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일본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일본은 아주 흔쾌히 군사 지원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급진개화파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종의 생활 습관이었습니다. 이 당시 고종은 낮에 잠을 자고, 밤늦게까지 일하곤 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명성황후가 밤을 이용해 병풍 뒤에서 함께 의견을 나누며 전지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사를 위해 급진개화파는 고정 잠재우기 프로젝트에 돌입합니다. 고종에게 많은 양의 문서를 확인하게 하여 밤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1884년 음력 10월 17일에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 명성황후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가 군사에 보냈는데 청나라군은 대략 1,500명이었고 일본군과 급진개화파는 약 500명이었습니다. 결국, 10월 17일에 시작된 갑신정변은 10월 19일에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며 실패했습니다. 고종은 11월 말, 일본 측에 사과를 요구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송환도 요구했지만 거부했습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서 협력자가 필요했던 만큼 김옥균을 조선에 돌려보내지 않고 살려두는 게 이득이었습니다. 얼마 뒤 일본은 “조선 민중들이 불태운 일본 공사관과 살해당한 일본인들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1884년 음력 11월 24일에 일본인이 입은 피해에 대한 사죄와 보상 그리고 일본 공사관 신축 자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는 ‘한성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때 일본과 청나라도 사이에도 ‘톈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훗날 조선에 긴급 상황이 발생할 때 일본군을 파병할 수 있게 됩니다.
제1조. 청일 양국은 4개월 이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제3조. 어느 한쪽이 파병하게 될 경우 상대 국가에 문서로 알리고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병하고 주둔하지 않는다.
일본은 갑신졍변이 실패한 이후에도 조선 침략을 꾀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군사비를 늘리고 군사 시설도 확장했습니다.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결정적 한 방을 노리며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책 "벌거벗은 한국사(근현대편)"을 읽고
'벌거벗은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2) (1) | 2025.03.11 |
---|---|
일본은 왜 불량 조선인 박열을 두려워했나(1) (2) | 2025.03.11 |
열입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2) (5) | 2025.03.10 |
열일곱살 유관순은 어떻게 거리를 태극기로 물들였나 (1) (0) | 2025.03.09 |
500년 조선왕조를 무너뜨린 일본의 치밀한 계략(2) (2) | 2025.03.08 |